내가 읽는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책도 진작 사두었다가 이제야 다 읽었다. 사자마자 휘리릭 살펴보고 '경제 개념이 거의 탑재되지 않는 내가 읽기엔 어렵겠다'는 판단에 미뤘었는데, 막상 읽고 보니 쉽고 재미있었다. 수많은 개념과 이론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하기 쉬운 우화로 부연설명 해주어서 좋았다. 화법이 거침없고 통쾌해서 지루하지도 않았고.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우파가 저지르는 오류
  1)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이다? | 시장은 정부 하기 나름이다 
  2) 인센티브는 중요하다? | 중요하지 않을 때만 빼고
  3) '마찰 없는 평면'의 오류 | 경쟁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4) 세금이 너무 높다? | 정부가 소비자라는 신화
  5)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는다? | 국가 경쟁력은 중요하지 않다
  6) 개인 책임이라고? | 우파는 도덕적 해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2부 좌파가 저지르는 오류
  1) 공정 가격의 오류 | 가격을 조절하려는 욕망은 자제해야 한다
  2) “정신병적” 이윤 추구? | 돈 버는 일은 나쁘지 않다
  3) 자본주의는 망하게끔 되어 있다? | 자본주의는 (겉보기와는 달리) 무너질 가망이 없다
  4) 임금을 평등하게 하자? | 어떤 직업은 여러 모로 열악할 수밖에 없다
  5) 부의 분배 | 왜 자본주의는 자본가를 잘 배출하지 못하는가
  6) 하향평준화 | 평등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적절치 않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자본주의가 영 탐탁치 않고 몹쓸 구석이 많아 보여서였다.
그래서 1부를 읽을 땐 '옳지. 속 시원하다' 신나게 읽었는데, 2부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골치 아픈 문제들을 마주하게 됐다.
책이 '자본주의를 의심할 때 필요한 논리'들을 제공해주리라 생각했는데
'자본주의를 의심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도 다루면서 "너도 무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셈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공정 무역 상품에 대한 비판(그냥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금전적인 원조를 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누군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농산물을 기르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필요도 없는 작물을 기르도록 물건 값을 지불하기 때문)
세계화에서 (손해보는 개인은 있어도)손해보는 국가는 없다는 의견.
그리고 빈곤층을 돕겠다는 선의에서 시작된 정책이 애초의 의도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 대한 언급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층을 돕는 게 소용없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정책 설계에 창의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언급이었다.)
그리고 전주영화제에서 본 김동원 감독의 <행당동 사람들 2 : 또 하나의 세상>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로 추앙했던 '협동조합'이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기억에 남는다.

결론적으로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자본주의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지독히도 어렵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귓가에서 웅웅대는 이유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이 불합리한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갑갑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던 그 기분,을 들춰냈기 때문이고
또 한가지
저렇게 결론내려 버리는 것이 혹시 '자본주의를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영속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하는 것(옮긴이의 글 중)'은 아닐지 주저주저 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내 의견이 생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다른 관점에서 쓴 책도 필요할 것 같고.
어쨌든
책 읽기에 있어선 끈기력 없는 걸로는 서울에서 두번째 쯤 되는 내가 하룻만에 400페이지를 읽었을만큼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건 확실하다.

2010/05/07 00:37 2010/05/07 00:37

수술 후 3주가 지났는데도 생각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흙길 위에서 털털털털, 부르르부르르, 먼지를 내면서 온 몸으로 시동을 걸려고 노력하는 트럭이 된 심정으로
겨우겨우 요즘 본 것들에 대해 기록한다.
어쩌면 요즘 본 것들이 너무 덩치 큰 이야기들이라 '막힘' 현상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생각이 술술 풀려나오길 기대하기 참으로 어려운 주제들이니까. 어쨌든.


# 홍형숙 <경계도시><경계도시2>

 

퇴원하자마자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무슨 영화들을 하는지 보려고 블로그에 구경을 갔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 홍형숙 감독이 대전에 내려와 감독과의 대화를 한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고, 기대치도 않았던 행운 덕에 이 영화들과 감독의 생각들을 만났다.
1편을 DAUM에서 다운로드해서 보고 극장에 갔는데, 1편보다는 2편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1편은 송두율 교수 본인에 집중했고, 2편은 송두율 교수라는 존재를 다루는 주변의 방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변의 방식이 결국은 우리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마음의 발을 뺄 수가 없다. 7년 전 있었던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래서 결국 나를) 들춰내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1시간 가량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정말 많은 이야길 들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감독이 "내 안에는 당연히 없으리라 여겼던 레드콤플렉스가 실제로는 있었다. 그게 강력하게 작용해서 작품의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당시엔 그저 버티고 기록하자는 심정이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스스로 몸 담고 있는 곳의 흐름에서 자신만은 예외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나도 자주 하는 생각인데, 그게 굉장히 허약한 착각이라는 걸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나만 정신 차리고 있으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라고 생각해도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칫솔질 할 때 칫솔모가 잘 닿지 않는 틈새를 닦으려면 조금 더 공들이고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들여다볼 때 조금 더 공들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깨달음.
감독과의 대화를 듣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해 뭐라 한마디 쓰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는 것. 구석구석 말끔하게 설명을 들으면 내 해석이 자라날 여지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관객에게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물론 홍형숙 감독의 이야기 자체는 완전 좋았다. 감독의 이야기가 좋았냐 나빴냐의 차원이 아니라, 영화를 텍스트 삼아 생각을 펼치고픈 욕구가 있는 관객에겐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이 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 김규항 <예수전>

나오자마자 사두었었는데, 읽긴 이제야 읽었다. 기대했던대로 재미있고 의미 깊은 책.
마르코복음(마가복음)에 기록된 인간 예수의 행적과 당시 시대상에 비춰볼 때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주는데, 완전 흥미진진했다. 나를 '한국 교회'에서 멀어지게 했던 거북한 면모들이 예수의 뜻과도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종의 통쾌함 같은 것도 느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얼마나 예수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특히 바리새이인들에 대한 설명에서 그랬다.
흔히 바리새이인을 위선적이고 못된 '공공의 적'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인민들에겐 존경을 받았던 계층이 바리새이인이라고 한다.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것처럼 보이는 엘리트층이라 인민들은 그들을 따르고 그들의 삶에 존경을 표했지만, 바리새이인들은 근본적으로는 그 지배체제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더 나아가 원하지 않았던 것. 지배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것은 멀리 보면 그 지배체제가 무너지는 원인을 사전에 제거해주기 때문에 그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원리를 통찰할 줄 알았던 예수는 그래서 유독 바리새이인들을 그토록 '갈구었다'는 것.
이 지배체제에 자본주의를 대입해보면, 말로는 자본주의의 해악을 설파해서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식견있다는 평을 듣지만 실은 자본주의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고 상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리새이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난 책의 이 지점에서 완전 찔렸다. 어머, 나 바리새이인이었던 거야? 이러면서 뜨끔뜨끔.
자본주의를 고도화시키는 데 상당히 일조하는 업계에서 일한다는 불편감(이전에도 살포시 느끼고 있던)이 또 다시 머리를 들이밀고 올라왔지만, 용기없음으로 주저주저하고 있다.


#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종교전쟁>

이 책도 읽을려고 사놓았던 건데 회사 다닐 때는 어마어마한 두께(600페이지 정도)에 엄두도 못내다가 이제야 읽었다. 사실 이번 휴가동안 했던 일 중 가장 보람찬 일 Best 3안에 들만한 사건. 내가 이렇게 두꺼운 책(소설도 아닌데!)을 결국 다 읽다니! 이렇게 감격할만큼 평소에 책을 끈기있게 못 읽는다는 얘기지만..어쨌든. ㅎㅎ
이건 뭐, 인상적이었던 것을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책이라서 뭐 어떻게 정리정돈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책이 내게 준 선물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도 있다는 사실이 준 안도감 같은 게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창조론을 믿어야 하는 것 같은 풍토가 장악하고 있지만, 그건 내키지가 않았었다. 성경이 과학 논문도 아닌데 자꾸 거기서 무슨 증거를 찾으려 하고 뭐라도 하나 나타나면 "봐봐. 우리 말이 맞잖아"라며 고것만 파고드는 창조과학이 가진 태도가 싫었다.
그리고 반대로 실질적 증거가 없으면 그것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믿는 과학주의도 내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삶을, 그리고 정신까지도 한 차원의 이론으로 '일괄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유물론도 이상하게 느껴졌고. 정말 <이기적인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을 쓴 도킨슨의 말처럼 이기적인 유전자니, 밈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일까? 그것들이 설명해주는 것이 분명 있겠지만, 그 이론들이 정말 섬세하고 촘촘한 삶과 생각의 결까지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나?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때 힌트가 된 예시가 있어서, 그리고 이건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옮겨 보자면

"두 분 선생님들께서 승용차가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합시다. "왜 저 차가 움직이고 있지?"하고 물어본다고 하죠. "자동차 바퀴가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하나의 수준에서 좋은 대답입니다. "엔진에서 연료가 연소해서 피스톤과 구동축을 움직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답 역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좋은 설명입니다. "철호가 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도 여전히 다른 수준에서 있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철호가 학교에 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언급한 모든 설명은 그 각각의 수준에서 뜻이 잘 통하며, 어떤 설명 하나로 다른 설명을 대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설명 하나하나는 서로 모순되거나 경쟁하지 않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설명인지는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 미리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설명들을 함께 고려할 때, 한 설명만 고려할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설명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설명의 다원주의는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됩니다."

내 설명은 하나의 수준에서 좋은 대답일 뿐이라는 한계를 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구절이다.


# 존 호트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앞에 발췌한 글은 <종교전쟁>의 공동저자인 호남신학대학교의 신재식 교수가 쓴 부분이었고, 그 글은 존 호트라는 신학자의 의견을 옮긴 부분이었다. 과학이 발전하면 그것에 맞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종교성이 드러날 것이고, 과학과 종교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닌 신재식 교수의 글에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읽게 된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존 호트의 책을 신재식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진화론을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필요 전혀 없다, 신이 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마음대로 하는 독재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신에게 투사해 왔는지도 모르는 전제군주의 이미지다, 오히려 기독교의 신은 자기를 낮추고 사랑의 대상이 오롯한 타자로 존재하길 원하는 신이다, 그렇기에 진화론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는 고마운 존재다.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이 책도 완전 재미있었다.
여러가지가 기억에 남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다윈주의와 유물론을 이퀄(=)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지적. 둘이 이퀄이라고 말하는 순간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이 신념으로서의 과학이 되고, 그건 과학 환원주의라는 이야기다. '발생학적 오류'에 대한 언급도 기억에 남는다. 발생학적 오류는 한 가지 현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면 그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비논리적 오류인데, 책에서 사용한 맥락도 인상적이었지만 일상에서 흔히 빠지는 오류라서 기억해둬야겠다 싶었다.
어쨌든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은 긍정하지만, 그게 신념의 차원으로 넘어오는 순간 반대하는 게 존 호트와 신재식 교수의 입장인데, 아직 깊게 생각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하고 잘 맞는(혹은 맞을 것 같은) 생각이다.

아참.
존 호트가 말한 '악'의 개념도 흥미롭고, 자극이 됐다.

"진화하는 우주에는 두 가지 형태의 악이 있다. 무질서라는 악이 있는데, 고통 전쟁 기근 죽음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또한 단조로움이라는 악도 있다. 단조로움이라는 악은 어떤 사물이 새로워지고 갱신되는 것이 적절할 때, 그것을 거절하면서 평범한 형태의 질서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움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질서를 혼란시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고 다른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삶의 둘레에 성벽을 쌓는다. 종교과 신학도 역시 질서의 고요에 너무 집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단조로움이라는 악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혼돈이라는 악을 무릅쓰고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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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결론은
거시적시각결핍자로 29년을 살다가
왜 갑자기 저런 거창한 생각들을 다루는 책에 꽂혔는지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것.
앞서 말한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에서 어떤 움직임이나 작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불가지론자인 생물학자가 쓴 <믿음의 엔진>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뭐, 어안은 벙벙하지만 재미있으니 됐다.
기록 끝. ㅎㅎ


2010/04/28 16:29 2010/04/28 16:29

궁금한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책, 영화, 음악을 읽고 보고 듣고 싶어진다.
그것들이 전해주는 '힌트'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겠구나, 하는.
그렇게 어깨너머로 상대방의 취향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어느새 그 책, 영화,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뭐랄까, 짜릿하다.
두 세계의 원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움직여서 작게 포개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릴 때 교집합, 여집합 등을 배울 때 보았던 산수 책 속 두 개의 원 그래프처럼.
그러나 그런 '우주적 이벤트'는 자주 벌어지지 않았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그 음악. 조선일보 시절 이동진 기자의 시네마 레터. 비틀즈. 우디 앨런. 에드워드 호퍼.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
물론 그렇게 어렵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우주적 이벤트'인 것이지만.

2주 전에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산도르 마라이라는 헝가리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것도 사람 때문이었다.
서늘할 정도로 예리하고 아름다운 구절이 몇군데 있어서 앞에서 말한 그런 기적을 기대했지만, 결론적으론 일어날 듯 일어날 듯 일어나지 않았다.
산도르 마라이의 <결혼의 변화>라는 소설을, 내가 좋아하는 박완서 할머니가 "펼쳐들자마자 첫 장부터 빨려들고 말았다"라고 평했다는데..그걸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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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 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 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좇을 수 있지만, 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의 형제지만, 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 나는 숲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 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임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사랑을 믿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인들과 함께 지낸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인 탓에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 아멘."

"구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이 깨지기 쉬운 형상, 세상을 유리로 감싼 듯 모든 것이 가슴 저리게 밝고 온아하다.
지금 구월의 유리 진열장 속에서, 세상이 진정 대가의 걸작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까칠한 잎새들이 제멋대로 늘어진 나무들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외롭게 빈방을 지키는 술 취한 남자들 같고, 왠지 짜증스럽게 꽃이 만발한 정원은 상여 같다. - 유리"

"아직까지 생명의 탄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어떤 것, 특정한 것, 학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생명의 탄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역학에 대한 안목이 없으며, 생명을 창조하는 신비하고 무서운 공장을 알 수 없다. 생명이 탄생될 때 가동되는 힘, 삶과 죽음의 힘. 그 시간에 어머니와 아이는 맹목적인 본응으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더듬거린다 -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순간에 힘이 솟구치면서, 마치 지진처럼 어머니의 몸을 밀고 폭파시킨다. 피와 태반 대신 뜨거운 마그마와 화산재가 자궁에서 흘러나와도 보는 사람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공장을 보았다. 숙연, 아주 숙연해진다. 잠시 후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증인들이 슬며시 방 안을 떠나면, 미켈란젤로가 돌팔이고 뉴턴이 풋내기였다는 느낌이 든다. - 공장, 역학"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기계적으로 그냥 따라 말하지 말고, 이제는 굳게 믿어야 한다. 어느 날 운명이 너를 손으로 건드리리라. 네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시각에 다른 의도로. 삶이 너에게 손을 대면, 너의 일상은 불가사의한 일들로 가득 차리라. - 손길"

"자연이 감기에 걸린 듯 대기가 오한에 시달린다. 나무들이 콧물을 흘리고, 젖은 수건으로 감싸듯 안개가 밤의 초원을 덮고 있다. 국화가 예민한 아이들처럼 재채기를 하고, 보리수나무 꽃차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세상이 열과 오한에 시달린다. 아침저녁으로 일 그램의 아스피린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오한"

"'눈이 내린다' 이 두 낱말은 더없이 비밀스러운 기본적인 삶의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너는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어"라고 이야기하거나 "조국,조국,조국"이라고 세 번 되풀이하여 말하는 듯 하다. 아니면 "기억이 나는가?"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감정에는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다. - 눈이 내린다"

"새벽 네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도시가 폭격을 맞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듯, 저녁에 기이한 적막이 도시를 뒤덮었다. 폭격기들도 침묵했다.
저녁 무렵 도시에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교외의 집 몇 채와 불가사의하게도 폭격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종탑만이 온전했다. 시내 중심가의 유서 깊은 아름다운 옛집들과 대성당은 파괴되었는데, 종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종지기는 저녁마다 그랬듯이 138개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 청동으로 주조한 종을 쳤다. 종소리가 시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종지기는 자신이 맡은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행동이 전혀 의미가 없다. 상징도 아니다. 도시가 멸망하면 상징들도 그 의미를 잃는 법이다. 그러나 종소리는 울려 퍼졌고, 폐허 위를 맴돌았다. 부상당한 자와 죽음을 앞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상했으며, 도시의 유일한 의미는 벽이 무너져도 침묵하지 않는 그 소리였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물론 종지기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종지기에게는 월말에 돈을 받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걱정을 하며 이를 악물고 종을 친 것이다. 그러나 새카맣게 그을린 돌 틈 사이에서 종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진 탓에, 도시는 폐허 속에서도 살아있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 종을 울리자. - 도시"

"언젠가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엄한 판사가 물을 것이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고통과 실망, 절망 뿐이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오. 당신은 행복한 적도 있었소. 자주는 아니지만 분명 행복한 순간이 있었소. 그 순간을 말해보시오."
뭐라 답변할 것인가? 나는 고개를 떨구고 귀 뒤를 긁으며 당황하여 앞을 응시할 것이다. 그리고 내 대답.
     "맞습니다. 저도 행복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행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맛이 아직도 혀에 생생하고, 그 향기가 코끝에 스치고, 그 긴장이 신경을 타고 흐릅니다. 그런데 그게 언제였지요? 어린 시절? ......아닙니다. 그다지 즐거운 어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청소년기 아니면 나이 들어서? 음울한 기억들이 더 강하게 모든 것을 뒤덮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과연 언제 행복했지요? ......이제 알았습니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평범한 순간이었습니다. - 행복"

"네가 사귀었거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인생을 추리 소설에서처럼 묘사하라. 그러면 별안간 모두들 수상쩍은 용의자가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조급하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들고, 의심스러운 물건이 사방에 널려 있으며, 하찮은 것들이 은밀한 의심의 빛을 받아 특이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용의자들"

"문학은 솔직하지 못하게 시건방을 떨며 돈을 경멸한다. 돈이란 막이 오르기 전에 무대 감독이 주인공에게 건네주는 연극의 소도구이고, 무대에서만 사용되며 성대한 공연에서 시시한 역할만을 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적어도 사랑이나 죽음에의 공포, 야망이나 조국애만큼 삶을 채우는 돈은 실제로 훨씬 더 미묘한 체험을 가져다준다. 돈과 관련된 일상적인 체험, 즉 이십 펭고의 특별 지출이나 오십 펭고의 특별 수입이 우리 삶에서 빚어내는 극적인 긴장감을 ,사랑이나 야심보다 한층 더 복잡 미묘한 이 감정의 응축을 묘사한 글은 아직까지 없었다. 돈이란 원래 그런 감정의 응축이며, 살다보면 사소하고 평범한 돈에서도 그런 감정의 응축을 자주 볼 수 있다. 팔 펭고 오십의 충격, 이십육 펭고의 행복, 십칠 펭고의 절망을 묘사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문학은 대부분 극단적인 것, 존재하지 않거나 터무니없이 많은 돈에 대해서만 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터무니없는 많은 것 사이에서 살고 계산하고 느끼고 열광하고 눈물을 흘린다. - 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수그러들거나 사라질 줄 모르고 말로 형용할 수도 없는 이 흥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나를 덮쳐서 시험하는 이 중압감과 불안 - 아침이고 저녁이고 글을 쓰기 전의 망설임, 거듭되는 준비와 마음의 각오, 게으름, 담배, 독서, 그리고 혹시 마지막 순간에라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남모르는 은밀한 기대, 게다가 실제로 방해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아무리 훈련을 하고 경험을 쌓아도 나아지지 않는 가슴 두근거림! 그러다가 정말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말이 무르익어서 신호가 되고 확정된 표현이 되려 한다. - 시작하기 전에"

"칠월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넘치게 무르익었다. 냉장고 안에서 우유가 응고하고 살구가 상하고 고기가 부패했다. 감정들이 시큼하게 변질되고 사회 구조가 조각나 떨어져나가고 국제 협정이 해체되었다. 보리수나무에 새싹이 돋는가 하면 장미가 시들었다. 사방 천지에서 파멸, 악운이 시큼하게 발효하며 부풀어올랐다. 들판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멍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플랑드르에서는 어느 외로운 농부가 밀짚모자를 쓰고 폭격 맞아 부서진 탱크 사이에서 밀을 베었다. 사랑은 단 하룻밤 불타오르고 시들었다. 칠월, 파멸의 달이었다고 기억한다. -파멸"


2010/04/22 12:33 2010/04/22 12:33
나는 검색할 때 네이버를 쓴다. 구글은 아주 가끔, 해외 사이트에서 정보를 모을 때만 쓴다. 외국 배우에 대한 썰을 풀어야 하는데 한국어 자료가 너무 없다던지 할 때. 요는 나는 구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2010년 4월호 기획회의를 준비하느라 서점을 뒤질 때 <구글드,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을 발견하고 바로 사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4월호 피처팀의 메가 이슈로 다뤄보고 싶다고 아이템도 냈는데, 그 이유는 올드미디어 종사자로서 갖고 있던 불안감 때문이었다. 구글이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그런 면에서 이 책을 고른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구글이라는 도구로 시대의 변화를 짚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구글이 미국 방송3사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낼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뉴미디어 시대의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띔을 해준다는 의미다. '의미있는 컨텐츠'에서 그 '의미'라는 것의 정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 매우 많이 든다. 그것도 하루 빨리 해야한다고 느껴진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잡지쟁이로서 내가 하루하루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되짚어 보면 한숨이 나온다.
<쎄씨>라는 잡지의 피처기사에 대해선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20대의 목소리를 가장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담을 수 있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쎄씨>엔 취업 기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2010년 <쎄씨>피처에선 취업 기사를 거의 매달 특집에 가깝게 내보낸다. 왜냐, 지금 20대들의 삶 전체를 들었다놨다 하는 이슈니까. 일반인이 대거 등장해야 하고 취재한 데이터들을 기억에 남도록 에디팅도 해서 담아야 하는 이런 취업 기사는 비주얼로만 놓고 봤을 땐 책을 후져보이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쎄씨가 취업기사들을 써댈 때, 비주얼과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다른 라이센스 매거진에선 본격적으로 취업기사를 쓰지 않았다. 라이센스 매거진은 본사로부터 하달받는 제작 가이드라인을 지켜야 한다. 절대 다루어서는 안되는 주제가 정해져 있고, 인터뷰 질문의 톤과 깊이까지 모두 정해져있다. 내가 로컬 매거진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런건지, 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게 좋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잡지를 사서 보는 20대에게 취업이 절대 화두라면 우중충하고 패션지와 참으로 안어울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쓰고 싶고, 써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끼어들 수 있는 또 한가지 질문은 사람들이 패션지를 왜 보느냐는 것이다. 취업 기사 읽을려고 패션지를 살까? 그런 독자 아이들도 종종 있어서 나도 놀랍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패션과 뷰티 신제품과 트렌드가 궁금해 패션지를 구입한다. 그리고 비주얼 경험. 머리를 환기시키는 비주얼 경험을 하려고. 그리고 에디터의 글에 녹아있는 시각을 맛보려고.
온라인에서도 충분히 브랜드 카탈로그를 구경할 수 있고, 트렌드을 읊어주는 글들도 넘쳐나고, 아름다운 디자인 워크를 뽐내며 비주얼 경험을 하게 하는 웹 사이트도 많은데 왜 굳이 패션지에 비용을 지불할까?
정보가 넘쳐날수록 그걸 엮어주는 존재가 절실해진다. 많이 알면 알수록 선택은 더 어려워지니까. 그 수많은 정보들을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누군가가 알려주었으면 바라게 된다. 그 SOS신호를 포착해서 가이드가 되어주는 게 내 생각엔 잡지의 존재 이유다. 패션지도 잡지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건 커버모델은 항상 어떤 포즈여야 한다, 시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 인터뷰에선 삶의 골치아픈 부분까지 캐묻지 말아야 한다 등등 매체별 성격을 규정하는 가이드라인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제작 가이드라인 없이 16년동안 만들어온 쎄씨가 16년째 엄청 잘 팔리는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인지라..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담지 않고, 그닥 신선한 비주얼 경험도 시켜주지 않고, 취재를 헐렁하게 하는데도 시장에선 잘 팔리는 잡지의 비밀에 대해선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도 그 비밀이 궁금하다.
여기서 살짝쿵 생각이 들었던 건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보그>는 엄밀히 보자면 잡지업계에 속해있다기 보다는 패션업계에 속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 패션 판타지의 확장이 그 잡지의 존재이유니까.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쓸데없는 게 궁금해졌다. 다른 잡지에 있는 에디터들은 자신이 잡지업계 종사자라고 생각할까, 패션업계 종사자라고 생각할까. 이건 내가 피처 에디터라 갖는 생각인가 싶기도 하고. 뭐. 어쨌든.

더 예민하게 고민할 게 수두룩한데
중앙m&b라는 회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잡지사가 '좋은 잡지란?'에서 '좋은'의 의미가 뭔지 고민해야 하는데
애먼 데 에너지를 쓰고 있다. 당장 수익을 내고 결과물로 돌아오는 것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게 올드미디어의 사망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도 힘을 발휘할까? 미디어는 사망해도, 좋고 의미있는 컨텐츠는 사망하지 않으니, 지금 통용되는 '좋고 의미있다'는 게 뭔지부터 고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오늘 오후
그룹 차원에서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모 프로젝트 회의에서
편집팀이 아닌 경영팀의 발표를 들으며 생각했던 게 많아
나야말로 애먼 데다 성토 대회를 열었다. 제목은 저렇게 써놓고 결국 <구글드...> 이야긴 제대로 하지도 않았잖아.ㅎ
발췌 정리는 추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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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에 시작한 발췌정리.


"기존 미디어 업체들은 '이노베이터의 딜레마'에 빠졌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동명의 저서에서 사용한 이 개념은, 경영 상태가 좋은 회사들이 신기술이나 신규 비즈니스 모델에 맞닥뜨리면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맹렬히 고수하면서 발 빠른 변화를 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테리 위노그래드)는 학생들에게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과 인간심리>같은 책을 읽게 했다. 이 책의 요지는 비디오, 컴퓨터, 도저히 열 수 없는 플라스틱 포장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십중팔구 소비자의 관점에서 제품을 디자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물건을 만든다. 노먼은 이렇게 꼬집는다. "이것은 기술의 패러독스다. 기능이 많아지면 그 대가로 복잡성도 증가하게 되고 마니.""

"MS의 방식은 이것이다. '당신들은 내 방식에 따라야 한다.' 반대는 이것이다. '아니, 난 만들기만 할 테니까 당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아. 난 그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도와줄 거야.' 이것이 유닉스 철학이다."

"그들은 AOL과 야후와 MSN이 받아들인 틀에 박힌 생각, 즉 포털을 만들어 온갖 컨텐트로 꾸며진 인공정원을 만듦으로써 사용자를 그 안에 가둬둬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사용자가 되도록 빠르게 구글에서 벗어나 검색 목적지로 가도록 해주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곳에 모인 엔지니어들은 성문화한 규정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 자체로 '탐욕스러운 기업'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그들이 생각하는 능률의 개념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시간 동안의 짜증스러운 토론 끝에, 폴 부하이트가 툭 내뱉었다. "다 치워버리고 그냥, '사악하게 굴지 마.' 이 한마디가 어떨까요?" ..... 이 문구는 구글의 기호가 되어 다른 기업, 특히 MS와 구글을 구별해주고 구글이 전 세계의 정보를 만인의 손끝에 무료로 전달해줌으로써 받은 호감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권한을 위임받은 엔지니어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빌 캠벨)가 말을 이었다. "혁신을 촉진하려면 엔지니어들이 상품-마케팅 파트에 주눅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 목표는 성장이고, 성장은 혁신에서 나온다. 혁신은 뛰어난 상품-마케팅 파트가 아니라 뛰어난 엔지니어들에게서 나온다." "

"G메일 논쟁을 보니 구글이 과학과 데이터와 수학 알고리즘에 너무 의존하여 응당 일어날 만한 사생활 침해에 대한 두려움을 간과하는 듯했다. 그리고 언젠가 구글이 검색시장을 완전히 지배할지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를 너무 가벼이 여기는 듯했다. ...... "... 그런데 그런 태도는 일봉의 오만입니다. 우리가 더 잘안다는 거죠. 소비자에게 더 좋은 게 뭔지 소비자보다 더 잘 알 수 있다는 생각이 구글에서는 허용되는 겁니다." "

"위노그래드가 말했다. "그 친구들은 제도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개인적이고 엔지니어다운 관점에서 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요!' 자신의 진심을 믿는 거죠" 물론 위노그래드도 그들을 믿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열정이 한편으로는 '우리는 똑똑하니까 우연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술적인 오만, 그러니까 '시스템은 절대 실수할 리 없다'는 오만을 낳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실수할 수 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구글 동맹들과 대가를 받고 싶어 하는 출판사(저자)의 이해관계는 '재산권'의 정의로 귀결된다. 인터넷에서는 컨텐트 생산자의 정보를 공유하는 대신, 몇 페이지에 걸쳐 내용을 복제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디어에서는 그런 '공유'가 통상 절도로 간주된다. 작가조합 역시 구글에 소송을 제기했다."

"출발하는 날부터 구글은 인터넷 전체를 복제했습니다.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처음으로 한 일이 존재하는 영화를 모조리 복제하는 것인 회사가 상상이 가십니까? 웹은 언제나 복제와 연관되지만, 저작권법은 복제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률입니다."

"양쪽 다 '저작권 도용'에 관해 말했지만, 기존 미디어는 방지할 수 있다는 쪽이었고 뉴 미디어는 노력은 해보겠지만 완전히 방지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라는 쪽이었다. 양쪽 다 컨텐트에 관해 말했지만, 둘이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기존 미디어에게 컨텐트란 전문적으로 제작된, 무삭제 TV프로그램이나 영화였다. 유튜브에게 컨텐트란 짧은, 대체로 사용자가 생성한 것이었다. 이런 논쟁은 여러 면에서 무의미했다. UGC든 전문적으로 제작된 컨텐트든, 모두 사용자의 주의를 끌기 때문이다. "컨텐트란 사람들이 시간을 쓰는 대상을 말하죠. 컨텐트는 코미디 채널에서 방영되는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페이스북도 컨텐트가 됩니다. 그건 소비자가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기로 하느냐의 문제지요." "

"이제는 소비자가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계속 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미디어 전문갑니다. 온라인에서 잘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어요. 온라인은 새로운 미디어라고요. 미디어에 관한 거라면 당신들이 저 실리콘밸리의 괴짜들보다 낫지 않나요? 지금 그놈들이 당신들 엉덩이를 걷어차고 있단 말입니다!""

""미디어가 모두 디지털로 옮겨가게 된다면, 결국 미디어 유형 간의 구별은 덜 중요해지거나 아예 무관해질 겁니다. 만약 내가 신문을 전자기기로 읽다가 슈퍼볼 경기의 터치다운 사진을 보고 클릭했더니 60초짜리 동영상이 나와서 그걸 보게 되었다면, 나는 지금 신문을 읽는 건가요, TV를 보는 건가요?" 소비자가 뒤로 기대든 앞으로 기대든 어떤 기기를 사용하든 두 가지가 혼합된 것을 사용하든, 미디어는 접근이 용이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구글과 야후는 항상 광과 판매를 위한 플랫폼에 열중합니다. (구글의 새로운 프로그램은) 모두 결국 어떤 미디어에서든 광고를 판매할 수 있도록 제작될 겁니다."

""중국을 달래려고 특정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다면, 강력한 광고주들을 달래려고 특정 사이트를 차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되면 개인정보 문제가 권력 문제와 뒤엉킨다. 구글과 더블클릭 둘이 합하면 막대한 소비자 데이터를 산더미처럼 수집한다."

""양방향 광고의 기본 모델은 매일 사용자의 새로운 관심사를 알아내도록 고안된 강력한 데이터 수집 비즈니스와, 그 데이터를 활용해서 사용자를 특정 방식으로 유도하는, 즉 어떤 상품을 사거나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멀티미디어를 창조하는 비즈니스를 결합하는 거죠""

"로턴버그는 핵심 질문이 '구글이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입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는다. 오히려 이렇게 바로잡아야 한다. '구글이 대체 왜 그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가?'"

""내가 암에 관해 책을 잔뜩 읽는다고 치죠. 그 정보가 내가 가입한 보험 회사로 새어 들어가서 보험료를 5% 인상시킨다면 그건 안 될 일입니다." 그(팀 버너스)는 그 정보들은 폼, 혹은 그 어떤 전화 회사나 케이블 회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내 겁니다. 다른 누구도 가져가선 안 됩니다. 그걸 어떤 용도로건 쓰고 싶다면, 나와 협상해야 합니다. 내가 동의해야 하고요."

""이건 완전히 다른 광고방식이에요. 당신이 도쿄에 있다고 하죠. 정오에요. 인구밀도가 무시무시하죠. 점심시간이 45분밖에 없어서 건물에서 달려 나갔는데 이미 음식점 자리가 부족해요. 그래서 전화기를 꺼내서 찾아보니 10분 내에 자리가 나오는 음식점이 여섯 군데가 떠요. 가고 싶은 음식점을 클릭해서 세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자리가 예약되죠. 이것이 광고일까요? 당신이나 내가 생각하는 30초짜리 광고는 아니죠. 하지만 그 음식점이 거기에 비용을 낸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사용자 고지서에 포함돼 있거나."

""이렇게 온라인에 뉴스가 집결되는 이면에는 저널리스트를 고용했을 때 거두는 투자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된다는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그 말은 구글이 만들어놓은 이런 환경에서 미디어로 돈을 벌려면 OPC, 즉 타인의 컨텐트(Other People's Content)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두 가지 의문에 답해주지는 못했다. '이런 노력이 돈을 벌게 해줄 것인가?' 그리고 '이런 스토리텔링이 웹에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아이스너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토리를 전시할 플랫폼이 아무리 많아져도, 결국 사람들이 어떤 스토리를 듣느냐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그는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간식을 먹듯 조금씩 섭취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미디어 회사들이 취할 전략은 메테르니히 시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는지 반대로 약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중에 슈미트는 배런이 말한 '경쟁자'가 야후나 MS, 디스플레이 광고 분야를 뜻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이들은 광고라는 퍼즐에 '세계적 수준의 창의성'을 제시하는 회사들이 아니다. 배런이 의미한 '경쟁자'란 결국 WPP나 그룹M,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일 것이다. 광고업계의 선수들 말이다."

"때로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기회와 같이 찾아왔다. 영화 스튜디오는 TV 떄문에 한동안 분통을 터뜨리다, 나중엔 영화 판매에 유리한 무대임을 발견했다."

"미디어 회사는 언제 영화가 상영되며 DVD가 발매되고 음반이 출시되는지, 쇼가 언제 TV에서 방영되는지, 언제 책이 출간되는지 발표했다. "통제가 관건이었어요. 비판이 아닙니다. 그게 그때의 사업이었으니까요. 뉴 미디어에서는 시청자를 컨텐트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컨텐트를 사용자가 있는 곳으로 퍼다 나르죠. 그리고 사용자들이 곳곳에 있어요.""

"한 저명한 미디어 중역이 내게 속삭이며 질문을 건넸다. 그는 구글이 자신을 위해 막대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었다. '구글이 사회를 위해 생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기존 미디어의 주머니에서 자기 주머니로 돈을 옮긴 것을 제외하면 무엇에 공헌했는가?"

"그들은 브랜드가 신뢰의 동의어이며, 예산 따위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소비자들은 대부분 <뉴욕타임스>에 실린 정보나, 애플의 '다르게 생각하기'나, 코카콜라의 맛이나, 볼보의 안전성이나, 월마트나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저렴한 가격을 신뢰한다. <와이어드>창립자 중 한 사람인 케빈 켈리가 블로그에 썼듯이 우리가 '인터넷을 무료정보 복사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 무료 복사본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켈리의 답은 이렇다. "복사본이 무료라면, 복사할 수 없는 것을 팔아야 한다." 그중 첫째는 '신뢰'다. 신뢰는 복제가 안 된다. "신용은 반드시 시간이 지나야만 쌓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마치 사회복지단체처럼 말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 사회이상주의는 인터넷 문화의 핵심가치였고, 그 형태는 웹이 개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오픈소스 운동이나, '군중의 지혜'를 신뢰하는 비영리모델인 위키피디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디어와 엔지니어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산다."

"하지만 인터넷 때문에 종이신문의 독자가 줄어들어 광고와 판매 수입이 적어지며, 1등 신문의 정보와 2,3차 가공정보들이 동일하게 취급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디지털 뉴스는 이 외에도 또 다른 부작용이 있다. 어떤 기사가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는지 신문사 사주들이 측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래리 페이지도 한탄했듯 방문자를 늘려주는 기사들은 대개 '브리트니 스피어스 무너지다' 혹은 '제시카 심슨 몸무게 늘다' 등 기자들이 쓰고 싶은 글이 아니다.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저급화 현상은 점점 악화된다."

"내가 말하는 '신문'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인쇄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다양한 뉴스를, 그들이 원하거나 필요하다고 기대조차 못한 뉴스까지 제공하는 '상품'을 뜻한다. 어쩌면 그것은 도서 리뷰일 수도 있고, 요리법일 수도 있고, 공직자들이 연금을 과도하게 받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파산 직전의 은행들이 중역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온라인이든, 인쇄본이든, 훌륭한 신문이라면 슈퍼마켓처럼 다양한 상품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저널리즘은 보통은 팀워크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 '편집자 없이도 기계가 뉴스를 수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저널리즘 집단을 생각 없이 묵살해버리면 민주주의에 필요한 고뇌하는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대다수의 수수께기를, 그것이 복잡미묘한 인간행동에 관한 수수께끼라도, 데이터만 있으면 풀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월스트리트는 그런 수학적 파생상품 모형을 믿다가 미국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세상에서, 과연 인간은 더 현명해지게 될까 아니면 반대로 더 단순해지고 멍해질까. 몇 세기 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과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혹시 편리함이라는 새를 잡으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한 듯하다. 변화의 물결을 보지 못하면 그런 의문을 곱씹을 여유조차 누리기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점."



2010/02/24 01:59 2010/02/24 01:59

이석원 <보통의 존재>

from 도서관 2010/02/14 23:58
읽은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밑줄 친 부분을 옮길 시간이 생겼다.
난 이석원의 음악만 들었지, 그의 인터뷰나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은 없어서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볼 힌트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음악을 봐서는 엄청나게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복잡하겠구나 싶긴 했지만.
그런데
이렇게 재밌고 귀여운(물론 그의 외모를 보면서도 귀엽단 말을 선뜻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얼굴을 안보고 책만 봐서는 귀엽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면을 가진 아저씨인지 몰랐다.
책을 읽으면서 혼자 낄낄거리다 배 잡고 웃고, 텅 빈 집에 울리는 내 웃음소리가 어색하고 민망해서 씁쓸하게 웃음을 거두는 짓을 몇번이나 했다.

이혼을 계기로 자신이 '보통의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글을 쓴 것이기 때문에
이 책엔 결혼과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을 던지는 구절들이 많다.
한때는 자신의 전부를 뒤흔들던 감정이 왜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사랑은 왜 변할까, 이런 식의 질문.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할 때
물론 '오죽하면 저걸 물어볼까'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그 장면에서 느낀 건
'쯧쯧.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와' 였다.
사랑은 당연히 변하는 거야, 니가 세상을 덜 겪어봐서 그런 어리광을 피우는 거야. 뭐 그런 느낌?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의 연출 의도가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의 난 (그때가 스무살이었으니까) 당연히 진정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유지태의 심정에 몰입이 되었었고.

어쨌든
이제 곧 서른이 되는데
유지태식의 '동화'에도, 이석원식의 '보도'에도 모두 동의가 되지 않는다.

뭐,
과도기는 재미있는 거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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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서로를 봐도 가슴이 뛰지 않고
키스는 짜릿하지 않을 때,
잡은 손은 무디어 별 느낌이 없을 때
그것이 왜 절망이 되지 않는지,
어떻게 그럼에도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고 싶다.
그럴 때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은 무엇인지."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희망이 생기리라는 희망.
소통이 가능하리라는 믿음.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속되리라는 기대...
어렸을 때부터 믿어왔던 가치들이 이렇듯 차례차례 허물어져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 심정은 참담하다."

"저는 사랑과 생명에 끝이 있다는 것에 찬성하는 편입니다.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하구요.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나의 삶은 38년간 무기력함에 시달리다가 마흔을 앞두었다는 시기적 절박감과 마침 무너졌던 건강 덕분에 생의 유한함을 절실히 목도한 후 비로소 삶에 생명력과 애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생토록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가 그제서야 하고 싶은 게 생겨나더군요."

"갈망의 마음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면서도 다른 존재의 간절함에는 무심했던 것이다. 간절함이란 이처럼 모순된 것일까. 눈앞에서 죽음으로 호소하고 있는데도 이토록 외면할 수 있다니. 아마도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무엇도 내게 이렇게 무심하리라. 나의 간절함은 결코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뿐."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그다음 버섯. 아주 음흉한 놈이다. 어렸을 땐 버섯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기도 아닌 것이 잡채 속에 들어가 늘 고기 행세를 하며 사람을 기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버섯의 진가를 알게 되고 난 후 이제는 고기가 주는 건더기의 쾌감을 만족시켜주면서도 정신적인 안정감까지 주는(건강에 좋으므로) 멋진 친구가 되었다."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로 길러내려 억압하고 채근하던 엄마는 이제 행여 자식 일에 지장을 줄까봐 늘 노심초사하는 늙은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분명 나의 생에 무언가 엄청난 결핍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구멍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아니 채우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내며 집안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 ... 그런 일상의 불가항력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슬프다."

"돌이켜보면 씁쓸한 것은 사람이 결혼하자고, 우리 같이 살자고 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제발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눈이 멀어서 맹렬히 달려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더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것. 그게 사람의 이기심이란 것일까."

"사랑을 약물의 힘으로 지속시킨다는 것의 순수성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랑을 호르몬 놀음으로 만들어버린 의학자나 조물주에게 먼저 따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그것은 남들보다 세상을 더 조심스럽게, 실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과 내가 거북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등딱지를 남들 것보다 좀 더 강하고 정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만큼 속의 알맹이가 약했기 때문이리라."

"어디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고 누구든 병들거나 죽지 않으며 사랑은 결코 시들어 소멸하지 않아 이별 따위 없는, 모함과 오해와 갈등 같은 것 없는 진짜 천국."

"세상은 자기만 알고 있어도 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굳이 공개적으로 쓸 때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너그러움과 호기심을 갖고 대해준다."





2010/02/14 23:58 2010/02/14 23:58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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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중 새벽 2시 25분.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를 기사로 옮기다
별안간 백석의 시에 꽂혀서 뒤적뒤적.
쓸쓸하고 서럽고 고단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시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놓인,  불 끄는 게 무서운 날 켜놓고 자는 등에 쓰인 글귀가 백석의 시였다.
불경처럼 서러워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은 새벽이다.


2009/11/12 02:31 2009/11/12 02:31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다. 현실이란 한없이 냉철하고 한없이 고독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머리 길이는, 일주일 전쯤 이발소에 갔어야 하는데, 라는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십대 소녀 대부분이 그렇듯이 표정에는 생활의 냄새가 결여되어 있었다."

"덴고는 말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언어를 사용하여 내 주위의 풍경을 내게 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환해나가. 즉 재구성을 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그건 수학의 세계에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작업이야"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후카에리는 말했다."

"뭔가가 작은 빈틈으로 들어와 그의 내면에 있는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후카에리가 만들어낸 공백이 아니다. 덴고의 내면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거기에 특수한 빛을 들이대 새삼 비춰낸 것이다."

"만일 인구조사에 대머리라는 항목이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거기에 체크가 될 거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길어진다. 또한 그것은 일단 말로 해버리면 가장 중요한 뉘앙스를 잃어버리는 종류의 일이었다."

"나비는 그 무엇보다도 허망하고 우아한 생물이랍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게 태어나 한정된 아주 조금의 것만을 조용히 원하고, 이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살그머니 사라져요."

"그는 비좁은 세계에서 협량한 룰에 따라 꾸역꾸역 살아가면서도..."

"...아오마메는 자기 안에 있는 다마키를 향해 말을 건넸다. 너는 특별한 존재야. 나는 너와 함께 성장해왔는걸. 다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

"달은 누구보다 오래도록 지구의 모습을 근거리에서 보아왔다. 아마도 이 지상에서 일어난 현상이며 행위 모두를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은 침묵한 채 말을 하지 않는다. 한없이 차갑게, 적확하게, 무거운 과거를 품어안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공기도 없고 바람도 없다. 진공은 기억을 아무 상처없이 보존하기에 적합하다. 어느 누구도 그런 달의 마음을 풀어낼 수 없다. 아오마메는 달을 향해 잔을 치켜들었다.
  "요즘 누군가와 껴안고 자본 적 있어?" 아오마메는 달에게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있어?" 아오마메는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쿨하게 살아가는 거, 이따금 피곤하지 않아?"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전자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결국 단순한 탈것에 불과하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건 에리야.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움직일 필요가 없어. 움직이는 건 그 주위의 모든 것이지"

"후카에리와 대화할 때면 이따금 이렇게 된다. 자신이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 했는지, 문득 흐름을 잃어버린다. 갑작스레 강한 바람이 불어와 연주하던 악보를 날려버리듯이"

"초경 전의 소녀를 범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남자, 기골이 장대한 게이 경호원, 수혈을 거부하며 스스로 죽어가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 임신 육 개월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 여자, 문제 있는 사내들의 뒷덜미에 날카로운 침을 꽂아 살해하는 여자,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 남자를 증오하는 여자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과연 유전자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유전자들은 그런 굴절된 에피소드를 컬러풀한 자극으로서 실컷 즐기고, 혹은 뭔가 또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일까.
  아오마메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아는 것은 자신은 이제 또다른 인생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반품하고 새 것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일그러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탈것의 존재방식이다."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덴고는 말했다. "그 두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이 기억은 너라는 인간을 규정하고, 너의 인생의 형태를 만들고, 너를 어느 정해진 장소로 밀어내려고 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네가 이 힘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라고."

"그들의 시간과 공간과 가능성의 관념 속에는 도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불편하기는 하더라도, 그들은 도로를 걸어가는 것보다 밀림 속을 은밀히 헤치고 갈 때 그들 자신의 존재 의의를 보다 명확히 포착할 수 있는 것이리라."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면 거기에 포함된 사실이 사실로서 보다 확고해져버릴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 싶다, 그런 심정이 담긴 침묵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세계가 아니야. 여긴 터진 틈과 부정합성과 안티클라이맥스로 가득한 현실세계야."

"하지만 현실이 아니라면, 다른 어디에서 현실을 찾아야 할지 그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이것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어떻게든 이 현실을 살아낼 뿐이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아오마메는 다시 한번 확인한다. 두려운 것은 현실이 나를 따돌리는 것이다. 현실이 나를 두고 가버리는 것이다."

"덴고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현재라는 교차로에 서서 과거를 성실히 응시하고, 그 과거를 바꿔 쓸 수 있는 미래를 차곡차곡 써나가는 것이리라."

"그녀는 그 치명적인 결락을 에워싸듯이 자신이라는 인간을 꾸며내야 했다. 그렇게 꾸며낸 장식적인 자아를 하나하나 벗겨나가면, 그뒤에 남는 것은 무의 심연밖에 없다. 그것이 몰고 온 격렬한 건조함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잊으려 애를 써도 그 무의 심연을 정기적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혼자 있는 비 내리는 오후에, 혹은 악몽을 꾸다가 눈이 떠진 새벽녘에."

"아유미는 치명적인 소용돌이의 중심을 향해 완만한, 하지만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접근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먹고 좀더 따스하게 받아주었다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우는 건 그만두자."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가 아니다. 황폐하고 메마른 사막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아니면 이 남자가 품고 있는 감정이 진공 같은 역할을 해서 주위의 모든 음파를 흡수해버리는지도 모른다."

"그 박동을 듣고 있는 사이에 자신이 비열한 도적이 되어 한밤중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란 내 안에 잠재된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그것을 더듬어온 작업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진언 같은 것이다, 덴고는 생각했다. 이런 문구를 외우는 것으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온 것이다. 덴고는 그 고집스러운 부적을 돌파해야 했다. 그 울타리 깊숙한 곳에서 살아 있는 한 인간을 끌어내야 한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르는 것이다."

"마음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 따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

"세계가 '비참한 것'과 '기쁨이 결여된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제각각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의 한없는 집적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창밖의 풍경은 보여주고 있었다."

"너의 사랑이 없다면 이건 그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아. 이 노래를 알고 있나?"
  "<It's Only a Paper Moon>"
  "그래 1984년도, 1Q84년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구성요소를 갖고 있어. 자네가 그 세계를 믿지 않는다면, 또한 그곳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건 가짜에 지나지 않아."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그림자는 지옥에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덴고는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질문과, 갈 곳 없는 발기를 떠안은 채 후카에리의 몸을 머뭇머뭇 계속 안고 있었다."

"1Q84년은 베이면 피가 나는 현실세계다. 아픔은 어디까지나 아픔이고, 공포는 어디까지나 공포다. 하늘에 걸린 달은 연극 소품이 아니다. 진짜 달이다. 진짜 한 쌍의 달.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는 덴고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가짜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인간의 피부세포는 매일 4천만 개씩 죽는다는 사실을 덴고는 문득 떠올렸다. 그것들은 죽어서 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간다. 우리는 어쩌면 이 세계의 피부세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느 날 문득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내가 길을 너무 멀리 돌아온 거 같아. 그 아오마메라는 이름의 여자애는, 뭐랄까, 오래도록 변함없이 내 의식의 중심에 있었어. 나라는 존재의 중요한 누름돌 역할을 해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게 너무도 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거 같아"

"하지만 이제야 겨우 알겠어. 그녀는 개념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야. 따스한 육체와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현실의 존재야. 그리고 그 온기와 움직임은 내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었어. 그런 너무나 당연한 일을 이해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어."

"달의 반짝임을 무심히 바라보는 사이에 덴고 안에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기억 같은 것이 차례차례 불려나왔다. 인류가 불이며 도구며 언어를 손에 넣기 전부터 달은 변함없이 사람들 편이었다. 그것은 하늘이 준 등불로서 때로는 암헉의 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사람들의 공포심을 달래주었다. 그 차오르고 이지러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시간관념을 부여해주었다. 달의 그같은 무상의 자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밤의 어둠이 쫓겨나버린 현재에도 인류의 유전자 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집합적인 따스한 기억으로."

"게다가 이 세계에 (혹은 그 세계에) 달이 한 개밖에 없건, 두 개가 있건 세 개가 있건, 결국 덴고라는 인간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거기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디에 있더라도 덴고는 덴고일 뿐이다. 고유의 문제를 안고 있고, 고유의 자질을 가진 한 명의 똑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 있는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건 그는 달이 두 개 있는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찾아낸 것이다. 이 온기를 잊지 않는다면,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2009/09/21 03:39 2009/09/21 03:39
"서머셋 몸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쓰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몸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하고 싶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계속하는 것-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으로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확실히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즐거울 때는 어느 정도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보다는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소리를(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내 안에 아직 손 닿지 않은 광맥 같은 것이 잠자고 있다는 느낌..."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달련하는 것."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비명을 올리고, 불평을 늘어놓고, 사정을 호소하고, 경고를 해댔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100킬로를 달린다는 것은 미지의 체험이었고, 모두 각기 할 말이 있는 것이다. ... 한때는 들끓고 있던 근육의 혁명의회도,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랑곳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 배달부를 책망할 수는 없다. 불쌍한 배달부는 그저 위에서 부여받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에게 그 일을 주고 있는 것은 친밀한 리얼리티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미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2009/07/30 01:47 2009/07/30 01:47
요즘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이란 책을 읽고 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명품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한 책.
베르나르 아르노가 어떻게 LVMH를 집어 삼켰는지, 그 방법이 얼마나 못되쳐먹었는지
톰 포드와 피노회장이 아르노의 손아귀에서 구찌를 지켜낸 사건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평생 단 하루도 일한 적이 없는 미우치우 프라다의 공산주의 페미니스트적 성향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왜 명품 브랜드들이 일본소비자를 잡기 위해 안달인지
샤넬 No.5를 만들고도 소유권과 권리를 빼앗겨버린 코코 샤넬이 얼마나 악착같이 그 권리를 되찾으려 노력했는지
2천만원짜리 에르메스 핸드백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다.

명품 브랜드의 시초가 된 수공업 장인 집안의 복잡한 가계도부터 각 브랜드의 인수 합병 과정, 어느 브랜드가 어느 브랜드의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등등 '역사'의 흐름과
샤넬 No.5에만 독점 공급하는 장미를 키우는 농장, 각종 연구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디오르 매장이나 에르메스 작업장 등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그 모습을 묘사한 '현실'에 대한 분석이
둘 다 빵빵하게 담겨 있어서
재미도 있고,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명품 브랜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노선도 나름 생긴다.

이 책을 구입해 읽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작가 소개글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탐나는 프로필이 존재하다니..

데이나 토마스
12년동안 <뉴스위크> 파리지국에서 문화 패션 담당기자로 활동했다. 1994년 이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서 스타일에 관한 글을 썼고, <뉴요커><하퍼스 바자><보그><워싱턴 포스트><파이낸셜 타임스> 런던지국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기사를 썼다. 현재 호주판 <하퍼스 바자>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파리의 앵글로아메리칸 언론협회와 해외언론협회의 회원으로 있다. 1996~1999년까지 파리 아메리칸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강의했으며, 1987년 시그마델타치재단 장학금을 받았고 엘리스 홀러 최우수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남편 에르베와 여섯 살 난 딸 루시 리와 함께 파리에 살고 있다.


프로필을 읽다가
'아, 에디터로서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동경하게 되었다.
왜 우리나라에선 패션지 기자가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는 걸까? 칼럼니스트처럼 활동하는 패션지 기자는 참 많이 보았지만, 저널리스트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보도 자료 받아서 쓰는 기사 말고, 취재원 입에서 나온 말을 받아 재가공하는 기사 말고, 어떤 물건이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품평 말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차근차근 취재해 쓰는 기사. 하루살이처럼 마감에 허덕이는 지금 같은 시스템 안에서는 나올 리가 없다.

특히 로컬지를 베이스로 한 우리 회사의 경우는
1년 플랜을 짜서 메가 이슈 아이템을 미리미리 결정해 선진행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템 회의를 할 때
"이건 좀 공을 들여서 12월쯤 내보내면 좋겠다" 말하면 "오, 그래. 좋은 아이디어야"라고 리액션을 하고도
유야무야 배당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우선 해봐. 기사가 나갈지 말지는 그 때 가봐서 얘기하자고'의 느낌이랄까.
기자가 열의가 있다면 알아서 틈틈이 진행해놓겠지만
당장 이번 달 배당받은 기사 막기도 벅차니까, 시간에 쫓기다 쫓기다 '아,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러면서 마음 속에서 자체 드롭을 하게 된다.
현재 우리 책이 유일하게 '선진행'에 공을 들이는 기사는 스타 아이템이다.
요즘 연예인 잡기가 너~무 어려워서, 미리미리 찔러놓지 않으면 스타님을 모실 수가 없다. <보그><바자>까지도 연예인 모시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좀 색다르게 스타를 모시기 위한 방편으로 영화감독을 끼고 배우를 섭외해 단편영화+화보 촬영을 하는 기획이 요즘은 잘 팔린다.
그런 단편영화+화보는 거의 브랜드 협찬으로 돈을 대어서 진행하기 때문에 PPL과 난해한 이미지가 난무하는 '뭥미?' 화보로 변질될 때가 많다.

에디터 입장에서 그런 화보를 볼 때는
'섭외하느라 고생이 많다' '저 장소는 다 어떻게 해결한 걸까' '브랜드 협찬은 페이지당 단가가 얼마 였을까' 등등 담당 에디터가 기울인 노고의 흔적을 찾게 된다.
하지만 매달 꼬박꼬박 잡지를 보는(사실 모니터링 차원에서 보는 거지만, 어쨌든) 독자 입장에서는
'저런 뻘짓 이제 그만 하고 진짜 멋지고 골져스한 저널리스트를 키워주는 기사 좀 만들지!' 란 생각도 든다.

입사하자마자 <보그>인가<바자>에서 1년짜리 프로젝트로 매달 '한국 패션사'를 연재했던 걸 진짜 재밌게 읽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런 기사가 존재했는데..요샌 '아, 진짜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피처 기사를 만나기 힘들다. <싱글즈>에서 종종 '아, 정말 시기적절하다!' 감탄하게 되는 피처 아이템은 보긴 하지만.
애들이 지금 딱 궁금해하는 걸 긁어주는 피처기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숙명을 지닌 곳에서 일하려니,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 관심사와 내가 써야하는 기사의 관심사의 갭이 커진다. 이번 달도 피처팀 배당을 두고 편집장과 신경전을 벌였다. 처음으로 정색하고 대들기도 하고.

내일부터 진짜 미친듯 일이 쏟아질 거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일요일 밤.
꿈같은 일을 해낸 누군가의 책을 핑계로 주저리주저리 넋두리만 늘어놓게 된다.


2009/06/28 20:54 2009/06/28 20:54
" 나머지 자초지종은 신문 사회면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속물적인 칼럼에서 읽었다. 나는 그런 기사를 자주 읽지는 않는 편이지만, 혐오할 만한 일이 다 떨어졌을 때 읽곤 한다."

"진짜 재미란 것은 없지만 부자들은 그걸 모르지.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으니까. 부자들은 남의 아내 빼고는 절실히 갖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만 그런 욕망도 배관공의 아내가 거실에 달 새 커튼을 갖고 싶어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기 그지없다네."

"나는 저녁 영업을 하려고 막 문을 연 바가 좋아. 안의 공기는 아직 시원하고 깨끗하며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바텐더는 막 거울에 자기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춰보며 넥타이가 똑바로 됐나 머리가 단정한가 점검하고 나오는 참이지. 바의 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병도 좋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유리잔이나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 저녁의 첫 잔을 만들어 빳빳한 받침 위에 내려놓고 작게 접은 냅킨을 옆에 놓아두는 모습도 좋지.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바에서 조용하게 그날 저녁의 첫 잔을 마신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야."

"격조 높은 흥분을 자아내긴 하지만 불순한 감정이지. 미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야. 나는 섹스를 비웃는 것은 아니네. 필수적이기도 하고, 추하게 볼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렇지만 항상 잘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섹스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유지하기란 십억 달러짜리 산업에서 일 센트까지 맞아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의 평범한 얼굴은 오랫동안 고된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보답을 받지 못해 주름이 진 듯싶었다. 그게 바로 경찰의 문제점이다. 경찰을 철저하게 싫어하려고만 하면 그 순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경찰을 만나게 된다."

"그해 강력계장은 그레고리우스 경감이었는데, 점점 희귀해지고는 있느나 아직 멸종되지는 않은 종류의 경찰로, 눈이 부실 정도의 불빛을 비추거나 고무 곤봉으로 갈기고 신장 부위를 걷어차며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차거나 명치에 주먹을 먹이고 척추 끝을 야경봉으로 치는 수법으로 범죄를 해결하려는 사람이었다."

"집어치우시지, 그렌츠. 술이나 마시고 인간답게 행동하라고. 당신이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기꺼이 알아줄 수 있어. 그렇지만, 시작하기 전에 쓸데없는 힘은 좀 빼라고. 당신이 충분히 강하다면 그런 건 필요없을 거요. 그리고 그런 게 필요하다면 당신이 나를 괴롭혀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거요."

"그러고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며 하얀 작은 테이블로 걸어가, 흰 운동복 바지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 옆에 가서 앉았다. 피부를 어찌나 골고루 태웠는지 수영장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이 확실해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여자는 비상용 소화 양동이처럼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그 모습에 그 여자에 대한 내 관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웃음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입을 벌리자 얼굴에 난 구멍만 봐도 충분했다."

"그들은 젊고, 피부는 그을렸으며, 정열적이고 활력에 가득 차 있었다. 전화 거는 데만도 내가 뚱뚱한 남자를 네 계단 정도 들어올리는 데 쓸 만한 근력을 쓰고 있었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면 모든 위험은 다 똑같아진다고 한 건 누가 한 말이었죠?
월터 배젓인 것 같군요. 고층건물 수리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요."

"집에 돌아와서는 TV를 켜고 권투 경기를 보았다. 별볼일 없는 경기로, 아서 머리 밑에서 무용 강사로 일하는 편이 나았을 선수들뿐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잽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작과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서로 페인트하는 게 다였다. 그중 어떤 선수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를 깨울 만큼도 세게 때리지 못했다."

"그는 이전에 내게도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궁한 적은 없었다. 개자식이 되는 방법으로는 백하고도 아흔 가지가 있는데, ..."

"다시 말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의사들이 그득한 건물이었다.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별로 깨끗하지도 않으며, 별로 기민하지도 않고, 간호사에게는 고작 3달러와 공손한 말 정도밖에 주지 못하는 사람들. 현재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종류의 환자를 받을 수 있는지, 돈을 얼마나 짜내서 유지비를 낼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치고 맥을 잃은 의사들. 신용카드는 받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십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십니다. 어금니가 상당히 많이 흔들리네요, 카진스키 부인. 새 아크릴 충전재를 하시는 게 어때요. 금니나 다름없답니다. 그럼 십사 달러에 해드릴게요. 이 달러 더 내시면 노보카인도 드리고요.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십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십니다. 삼 달러 되겠습니다. 지불은 간호사에게 해주세요."

"나는 질겅질겅 씹힌 실오라기 같은 기분으로 차를 돌려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불에 탄 나무판에 얹어 내오는 햄버거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매시드포테이토, 튀긴 어니언링, 집에서 부인이 해줬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겠지만 식당에서는 군말 없이 먹어치우는 혼합 샐러드를 곁들인 음식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전날 밤 받은 넉넉한 수임료 덕분에 늦게 일어났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뒤 캐나다산 베이컨을 한 조각 더 먹고 나서는 다시는 전기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300번째 다짐했다."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전화를 끊자 나는 체스판을 꺼냈다. 나는 파이프를 채우고 체스말들을 사열하여, 프랑스식으로 면도했는지, 단추가 헐렁해진 데는 없는지 검사하고 나서 고르차코프와 메닌킨의 챔피언 결정전을 복귀해보았다. 72수 만에 끝나는 경기로, 꿈쩍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무적의 군대, 갑옷 없는 전투, 무혈의 전쟁의 훌륭한 견본이었으며, 광고회사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인간 지성 낭비의 정수였다."

"달은 보름달에서 나흘 정도 지나 약간 이지러졌고 벽에 어린 달빛의 네모난 조각이 장님의 커다란 우윳빛 눈처럼, 벽의 눈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다. 농담이다. 이 바보같은 직유법이라니. 작가들이란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를 닮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 머리는 휘저은 크림처럼 뭉클하지만,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다. 또 직유법을 써버렸군. 이런 저질의 작업들을 생각하면 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러먹은 녀석, 웨이드. 형용사를 세 개나 쓰다니, 작가로서도 글러먹었어. 제기랄, 형용사를 세 개씩 쓰지 않으면 의식의 흐름조차도 묘사하지 못하는 거야?"

"모든 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아침이었다. 나는 진이 빠졌고, 지쳤으며, 몸이 둔했다. 시간은 수명이 다 된 로켓처럼 부드럽게 윙윙대며 일 분  일 초씩 흘러가 공허 속으로 떨어졌다. 바깥 관목숲 속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차들은 끊임없이 로렐캐년 위아래로 지나갔다. 보통은 그런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시무룩했고 심통이 났고 지나치게 민감했다. 나는 숙취를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지치고 초조해 보였다. 이 바보 같은 건축물 덩어리가 그녀를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집이라면 잘 웃는 멍청이도 우울해질 것이고, 킥킥거리다가도 구슬프게 한탄하는 비둘기로 변할 것이다."

"내 마음 다른 구석에서는 여기서 나가서 이 일에서 손 떼라고 하고 있었지만, 이쪽은 절대 따르지 못할 부분이었다. 내가 일찌감치 그렇게 했다면, 나는 고향에서 계속 살면서 철공소에서 일하고, 주인집 딸하고 결혼해서 애를 다섯 낳아 일요일 아침에 애들에게 웃기는 신문이나 읽어주고, 애들이 버릇없이 굴면 머리를 찰싹 때려주기도 하면서, 애들에게 용돈을 얼마 줘야 할지, 애들이 라디오나 TV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봐야 할지와 같은 일로 아내와 승강이를 벌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을 유지가 되어, 방이 여덟 개나 있는 집에서 살고, 차고에는 차 두 대를 넣어놓고, 매주 일요일마다 닭고기 요리를 먹고, 거실 탁자 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놓여 있으며, 인두로 머리카락을 지진 아내와 함께 머리가 시멘트 자루처럼 굳어버린 채로 살고 있겠지."

"저 멀리서 밴시의 울음 같은 경찰차나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높아졌다 사라졌으니 완전히 긴 적막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 외로움이나 복수심, 공포 때문에 절망적이 되고 분노하기도 하고 잔인해지기도 하며 열에 들뜨고 몸을 흔들며 흐느끼기도 한다. 다른 도시보다 더 나쁠 것도 없는 도시, 부유하고 활기차고 자부심으로 가득 찬 도시, 잃어버리고 얻어맞고 공허함으로 가득찬 도시.
모든 것이 다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개인이 따놓은 점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나는 술을 다 마셔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검시관은 부인이 마치 한 켤레의 벨벳 장갑이라도 되는 양 살살 다뤘다."

"그리고 입을 열자 나온 목소리는 마치 시간을 알려주는 전화기에서 나오는 기계 목소리처럼 명료하고 공허했다."

"커피는 너무 우려냈고 샌드위치는 낡은 셔츠에서 찢어낸 조각처럼 냄새가 너무 진했다. 미국 사람들은 빵을 구워서 이쑤시개 두 개로 꽂아놓고 옆으로 양상치가 비어져나오게 만든 것이면 무엇이든 먹는다. 그것도 시든 양상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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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중요한 스승님 중 한명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라고 했다기에, 그리고 하루키가 워낙 챈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나도 챈들러의 소설을 분명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선님(<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의 김동영 작가)'이 말해주어서 알게 된 <기나긴 이별>.

650페이지나 되는 두께는, 긴 호흡으로 독서하는 습관이 전혀 없는 나로선, 원망스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다행인 건 추리소설이라 책장 넘기는 속도가 다른 소설의 2배 정도는 빨랐다는 사실.
생선의 말대로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해변의 카프카> 같은 소설의 냄새가 몇몇 장면, 그리고 사물의 묘사 방식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주인공 '필립 말로'의 캐릭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내 머릿 속에선 하루키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남을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 "필립 말로..."라며 이야기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난 피식 웃음부터 지을 것 같다.
이 남자, 너무 재밌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온전히 백퍼센트로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그게 유아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될대로 되라지'식의 태도라 매사에 긴장하는 법도 없고, 속으로 온갖 것들을 씹어대며,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 한번 생각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는 모습이 자꾸 웃게 만든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답게 전반적인 분위기는 근엄하고 비장한 면이 있는데, 필립 말로는 왜 그렇게 귀여운 면이 있는지..  날카로운 추리력에 놀라며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디앨런의 발작적 수다를 볼 때 느꼈던 코믹함과 친근함을 느끼는 일이 오히려 많았다.

확실히 재밌는 소설이고
챈들러의 묘사력은 정말 끝내준다.

2009/05/10 22:52 2009/05/10 22:52